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폐비 윤씨 (문단 편집) === 폐위 === 하지만 이 사건 이후로도 남편과의 불화는 갈수록 심해지다가 회복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고, 마침내 왕은 중전을 폐위시켜 궁궐에서 아예 쫓아내기로 완전히 결심을 굳힌다. 결국 1479년, 왕은 대부분 신하들의 만류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전을 끝내 [[폐위]]하였다. 역시 이번에도 국모이자 원자의 생모를 어떻게 함부로 폐위하냐는 원칙론에 입각하여 신하들이 반대했지만, 이미 왕의 결심이 확고한데다가 [[정희왕후|자성대왕대비]] 윤씨부터 [[소혜왕후|인수왕대비]] 한씨까지 윤씨의 폐위에 찬성한터라 소용이 없었다. 폐비 윤씨 하면 가장 유명한 이야기인 '''왕의 얼굴에 손톱으로 상처를 냈다'''는 설이 있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기록이 없으며 '''[[야사(역사)|야사]]'''로만 전해진 소문이라 진위 여부를 알 수 없고 정황상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만약 정말로 용안(얼굴)에 흠집을 냈다면 왕의 신체를 옥체라 부르고 부위마다 '용(龍)'이나 '옥(玉)' 등의 고귀한 표현을 붙여가며, 신성하게 취급하는 조선시대의 관념에서 보면 중전이 왕의 얼굴에 상처를 낸 일은 가히 [[역모]]에 버금갈 일이다. 왕 역시 왕비의 방에서 뭐가 발견됐고 이런 저런 말과 행동을 했다고 구구절절 중전의 폐위 이유를 나열하며 주장하는 대신, 자신의 얼굴 상처 한번 보여주는 걸로 단박에 신하들의 수긍을 받아냈을텐데 그런 정황도 없다. 대비들 역시 중전의 악행에 대한 온갖 예시를 드는 와중에 그런 내용은 일언반구도 없으며, 당시 모든 신하들이 윤씨의 처벌을 반대했다는 점에서 왕의 얼굴에 상처를 냈다는 건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다음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왕이 밝힌 폐위 이유이다.[* [[성종실록]] 105권, 성종 10년(1479) 6월 5일 경인 4번째기사] * 지난 [[1477년|정유년]]에 윤씨가 몰래 [[독약]]을 품고 사람을 해치고자 하여, [[곶감|건시]]와 [[독약|비상]]을 주머니에 같이 넣어 두었으니, 이것이 나에게 먹이고자 한 것인지도 알 수 없지 않는가? * 혹 무자(자식을 낳지 못하게)하게 하는 일이나, 혹 반신불수가 되게 하는 일, 그리고 무릇 사람을 해하는 방법을 작은 책에 써서 상자 속에 감추어 두었다가, 일이 발각된 후 [[인수대비|대비]]께서 이를 취하여 지금까지도 있다. * [[귀인 엄씨|엄씨]] 집과 [[귀인 정씨(성종)|정씨]] 집이 서로 통하여 윤씨를 해치려고 모의한 내용의 언문을 거짓으로 만들어서 고의로 권씨의 집에 투입시켰는데, 이는 대개 일이 발각되면 [[귀인 엄씨|엄씨]]와 [[귀인 정씨(성종)|정씨]]에게 해가 미치게 하고자 한 것이다. * 항상 나를 볼 때, 일찍이 낯빛을 온화하게 하지 않았으며, 혹은 나의 발자취를 찾아서 없애버리겠다고 말하였다. 비록 초부(初夫)의 아내라 하더라도 감히 그 지아비에게 저항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왕비가 임금에게 있어서이겠는가? * 위서(가짜 문서)를 만들어서 본가에 통하여 이르기를, "주상이 [[가정폭력|나의 뺨을 때리니]], 장차 두 아들을 데리고 집에 나가서 내 여생을 편안하게 살겠다."고 하였는데, 내가 우연히 그 글을 얻어보고 일러 말하기를, "허물을 고치기를 기다려 서로 보도록 하겠다."라고 하였더니, 윤씨가 허물을 뉘우치고 말하기를, "나를 [[거제]]나 [[요동]]이나 [[강계]]에 처하게 하더라도 달게 받겠으며, 남방기에서 발원한 대로 사람의 허물을 무량수불 앞에서 연비[* 팔을 불로 지지는 행위]하여 이를 맹세하겠습니다."라고 하므로, 내가 이를 믿었더니, 이제 도리어 이와 같으므로, 전일의 말은 거짓 속이는 말이었다. * 상참으로 조회를 받는 날에는 비가 나보다 먼저 일찍 일어나야 마땅할 것인데도, [[늦잠|조회를 받고 안으로 돌아온 뒤에 일어나니]], 그것이 부도에 있어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항상 궁중에 있을 때에 대신들의 가사에 대해서 말하기를 좋아하였으나, 내가 어찌 믿고 듣겠는가? * 내가 살아 있을 때에야 어찌 변을 만들겠는가마는, 내가 죽으면 반드시 난을 만들어낼 것이니, 경들 중에 반드시 오래 살아서 목격할 자가 있을 것이다. 다음은 [[조선왕조실록]]에 왕대비가 밝힌 폐위 이유이다. [[성종실록]] 105권, 성종 10년(1479) 6월 5일 경인 4번째기사 * [[성종(조선)|주상]]이 혹 때로 편치 않을 때가 있어도 마음에 개의치 않고 꽃 핀 뜰에서 놀고 새를 잡아 희롱하다가도, 만약 제 몸이 편치 않으면 갑자기 기도하여 이르기를, "내가 죽지 않기를 바라니 보여 주기를 원하는 일이 있다."고 하였다. 평소의 말이 늘 이와 같으니 우리들은 항상 두려워하였다.[* 임금이 아플 때는 신경 안 쓰고 탱자탱자 놀다가 자기가 아프면 낫게 해달라고 빌었다는 말이다. 또한 그때 살아있어서 나중에 보여줄 것이 있다는 말은 [[연산군|자신의 아들]]이 훗날 [[성종(조선)|성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다면, 왕의 어머니인 [[인수대비|자신]]이 성종보다 오래 살아 왕대비로서 권력을 쥐고 이를 통해 보복을 하겠다는 걸 의미한다. [[조선 왕실]]에서 왕대비가 [[수렴청정]]을 비롯해 얼마나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는지 생각하면 사람들이 두려워하는게 당연했다] * 만약 [[성종(조선)|주상]]이 편치않을 때를 만나면 독을 [[수라상|어선]](임금에게 올리는 음식)에 넣을까 두려워하여 여러가지 방법으로 방비하면서 중궁이 지나가는 곳에는 [[수라상|어선]]을 두지 않도록 금하였다. 우리들이 비록 이름을 [[왕비|국모]]라고 하나 본래는 평인인 것이요, 한 나라에서 높임을 받는 분은 [[성종(조선)|주상]]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그런데도 매양 경멸하여 [[성종(조선)|주상]]으로 하여금 안심하고 음식을 들 때가 없게 하였고, 제 스스로 그전에 대죄가 있다고 여기는데도 오히려 요동시킬 수 없으니, 지금에 와서 난들 어떻게 하겠는가? * 비록 자식이 없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보전하고자 할 것인데, 하물며 원자가 있었음에랴?[* 자식이 없었어도 자기 자리를 지키려고 할텐데 원자가 있으니 더욱 탐욕을 부렸다는 말이다.] 그 악이 날로 커져서 꺼리는 바가 없었으나, 주상은 도량이 너그럽고 인자하므로 매양 비호하면서 허물을 고치게 하려고 한 것이 한 가지 일만이 아니었다. 우리들이 비록 부덕하더라도 옛 현비의 일([[인종(송)|인종]])을 인용하여 가르치기를 곡진하게 하였어도 일찍이 들으려고 생각지 아니하였다. 지금에 와서 이와 같이 결단한 것은 다시 허물을 고칠 가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 평소에 시비에게 죄과가 있으면, 반드시 이르기를, "지금은 비록 너에게 죄줄 수가 없더라도, 장차는 너를 족멸시킬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와 같은 마음으로써 [[연산군|원자]]를 가르친다고 하면 옳겠는가? * 지난 해에는 중궁이 [[성종(조선)|주상]]을 용렬한 무리라고까지 하였고, 또 그 자취도 아울러 깎고자 하므로 주상이 부득이 정승들에게 알렸던 것이다. 이제 [[연산군|원자]]에게는 가련한 일이나, 주상의 근심과 괴로움은 곧 제거될 것이고, 우리들의 마음도 놓여질 것이다. * 무릇 불의한 일을 행했을 때에 우리들이 보고 물으면 대답하기를, "주상이 가르친 것입니다."하고, 주상이 이를 보고 꾸짖으면, "[[인수대비|대비]]가 가르친 것입니다."라고 하여, 그 거짓된 짓을 행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 종묘에 제사를 올릴 때 우리와 주상은 제사 음식에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공경하는데, 중궁은 차례도 무시하고 이를 사사로이 쓰고 다닌다. * 지난 [[1477년|정유년]] 3월 20일에 [[귀인 엄씨|엄 숙의]](嚴淑儀)가 [[귀인 정씨(성종)|정 숙용]](鄭淑容)과 더불어 중궁 및 [[연산군|원자]]를 모해(謀害)한다는 글 두 통과 비상(砒礵) 약간(若干)과 압승책(壓勝冊) 한 권을 작은 상자에 담아 가지고 백저포(白苧布) 보자기로 싸서, 권 감찰(權監察)의 집 사람이라 일컫고 권 숙의(權淑儀)의 집에 던졌는데, 권 숙의의 집 사람이 그 상자를 가지고 대궐에 나아와서 숙의에게 바쳤다. 봉보부인(奉保夫人)[* 국왕의 유모]이 일찍이 어침(御寢)에 나아갔더니, 중궁이 신다울루목(神荼鬱壘木)[* 악귀를 쫓기 위해 만드는 말뚝. 그러니까 임금과 대비를 무슨 악귀 취급해서 죽었으면 했다는 것이다.]을 가지고 말뚝을 박는 소리가 있었는데, 사람의 발소리를 듣고 그친 일이 있으며, [[성종(조선)|임금]]의 침방(寢房) 옆에 쥐구멍이 있어 쥐가 항상 드나들었는데, 중궁이 책(冊)을 가위질하고 남은 종이로 그 쥐구멍을 막았었으며, 작은 상자를 끄집어 내는 데에 미쳐서는 상자 가운데의 서책(書冊)이 모두 다 숙배(肅拜)하는 단자(單子) 종이였다. 어느 날 봉보 부인이 또 중궁의 침실에 나아갔다가 쥐구멍에서 먼저의 종이를 끄집어내어 취하여 보고는 마음에 의심스러워서 [[인수대비|대비전]](大妃殿)에 바쳤는데 그것도 숙배 단자의 종이였고, 그전에 드러난 압승서(壓勝書)와 빛깔이 같았으며 그 가위질하여 들쭉날쭉한 곳도 같았다. 이에 삼전(三殿)[* [[정희왕후]], [[소혜왕후]], [[안순왕후]] 3명의 대비를 말함.]은 전일(前日)에 말뚝박는 소리를 내었던 것이 반드시 책을 만들 때였을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중궁은 한가지 감추는 것이 있어서 항상 친히 자신만 열고 닫았으며 다른 사람이 엿보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였고, 또 작은 상자가 있는데 그것을 감추듯이 숨기므로 주상이 자못 이를 의심하여 중궁이 세수하는 틈을 타서 취하여 보니, 가운데 한 개의 작은 주머니가 있고 주머니 안에는 [[독약|비상]](砒礵) 가루가 있었으며, 상자 안에 [[독약|비상]]을 바른 건시(乾柿) 두 개가 있었으므로, 그리고 나서 중궁의 소위(所爲)인 것을 알았던 것이다. 다음은 [[조선왕조실록]]에 윤씨가 [[사약|사사]]된 후 대왕대비가 말한 윤씨의 일화이다. [[성종실록]] 144권, 성종 13년(1482) 8월 16일 임자 2번째기사 * 비단 [[독약]]을 가지고 [[후궁|첩]]을 죽이려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종(조선)|어린 임금]]을 내세워 뜻을 이루어서 권력을 마음대로 하고자 기하였으니,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오래 살면 장차 할일이 있다."고 하고, 또한 스스로 상복을 입는다고도 하였으며, 장막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소장(素帳)이라." 하고[* 궁궐에 장막이 쳐진 것을 보고 초상집 같다고 했다는 뜻. 정희왕후의 증언이므로 따로 증거는 없으나 윤씨가 실제로 했다면 심각한 발언이다. 궁에서 초상 치르는 예식을 갖추는 것은 후궁이나 종친, 공주 따위도 안되고 왕가의 정실 직계, 즉, 대비나 왕, 왕비 정도가 죽어야 가능하다. '''궁궐 장식을 보고 초상집 같다고 말한 건 대비나 왕, 왕비가 죽었으면 좋겠다거나 죽은 것 같지 않느냐고 한 것'''과 비슷하다. 여기서 왕비는 윤씨 본인이니까 결국 이 말이 가리키는 대상은 당시 대왕대비였던 [[정희왕후]]와 대비였던 [[소혜왕후|인수대비]], 그리고 국왕이였던 [[성종(조선)|성종]] 뿐이다.] * [[성종(조선)|주상]]에게 말하기를, '''"그 눈을 빼고, 발자취까지도 없애버리며, 그 팔을 끊어버리고 싶다."''' 하였으니, 이와 같은 말들을 어찌 이루다 말하겠습니까? * [[독약|비상]] 가루를 옷 속에 차고 다니며, 주상께서 편치 못할 때에는 더욱 이를 기뻐하였고, [[수라상|어선]]이 있는 곳을 아무 때나 출입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이러한 일을 막고 막았는데, 주상이 어찌 다 알겠습니까? * 우리들은 주상이 [[경복궁|계신 곳]]이 좁기 때문에 [[창경궁|수강궁]]으로 옮겨갔는데, 그 때 우리들은, "우리들이 비록 있어도 어떻게 구하겠는가? 그런데도 그가 [[저주|하는 짓]]을 알지 못하는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매우 상심하며 눈물을 흘리고 떠났습니다. [[종묘]] [[사직]]에 복이 있어서 주상이 그의 독해를 당하지 아니하였으니, 다행입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